건축은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열두 개의 국제 공모전 당선작을 가로질러 읽으면, 한 가지 이상한 공통점이 떠오른다. 오늘의 건축은 자신이 너무 많아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테헤란의 한 사무소는 35년 된 건물의 90%를 덜어냈고, 이탈리아의 와인길은 풍경에 묻혀 스스로 오브제이기를 거부했으며, 교토의 파빌리온은 도시의 틈새에 고요만 끼워넣었다. 짓는 행위가 곧 미덕이던 시대가 지나고, 이제 건축은 덜 짓고, 숨고, 사라지는 방법을 경쟁하듯 실험한다. 새것을 올리는 대신 버려진 화물선과 폐(廢)양조장을 되살리고, 사막에서는 영구히 머무는 대신 움직이며 영속하는 기계를 상상한다. 건축이 두려워하는 것은 분명하다 — 자신이 남기는 탄소, 폐기물, 그리고 풍경 위의 과잉이다.
그런데 이 겸손에는 묘한 균열이 있다. AI가 열두 작품의 형질을 횡단하다 발견한 모순이 그것이다. 실제로 지어지는 건축일수록 "사람을 모으겠다"는 사회적 야심을 말하고, 지어지지 않을 건축일수록 "사라지겠다"는 미학적 후퇴를 말한다. 시드니의 학교는 원주민과의 화해를 건축으로 번역하려 했고, 테네리페의 교회는 15년에 걸친 주민들의 기부로 공동체의 정체성이 되고자 했다. 책임이 실재할 때 건축은 사회를 약속한다. 반대로 지어질 의무가 없는 제안일수록, 건축은 풍경에 묻히고 틈새로 물러나는 겸손의 미학을 더 자유롭게 실험한다.
그러나 같은 '지어지지 않는 건축'이라도, 초고층의 환상으로 넘어가면 풍경은 다시 뒤집힌다. 맨해튼 상공에 수분곤충의 서식지를 세우고, 바다 밑에서 미세플라스틱을 거르고, 사막에 유목 문명을 부활시키겠다는 eVolo의 제안들은 사라지기는커녕 세계 전체를 떠맡으려 한다. 덜어내는 건축과 세계를 구원하는 건축이 똑같이 '미실현'이라는 한 우산 아래 있다. 결국 책임에서 멀어질수록 건축은 두 방향으로 갈라진다 — 한쪽은 한없이 겸손해지고, 다른 한쪽은 한없이 과대해진다.
여기서 의심이 시작된다. 그 겸손은 진짜 윤리인가, 아니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자의 사치인가. 사라지겠다는 건축은 정말 세계에 덜 개입하는가, 아니면 개입의 책임만 우아하게 회피하는가. 장소의 재료와 기억을 "번역한다"는 다섯 번째 태도조차, 누군가에게는 경의이고 누군가에게는 전유(專有)일 수 있다.
오늘의 건축은 과잉을 두려워하는 법은 배웠다. 하지만 부재(不在)도 하나의 권력이라는 사실은 아직 배우지 못한 듯하다.
그 자리에 남겨지는 사람들은 누구인가?